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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이해하는 관계는, 관계일까요
“이해하는 역할에 익숙해졌어요.
그래야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가끔은
‘나도 이해받고 싶다’는 마음이,
숨처럼 차올라요.”
언제부턴가
나는 이해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 사람이 예민한 날엔
맞춰주고,
연락이 뜸해도
“바쁘겠지” 하며 넘기고,
서운한 말을 들어도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삼켰어요.
그러는 게
어른스러운 거라고,
배려라고,
관계를 지키는 방법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해왔어요.
그런데요,
그렇게 이해만 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내 감정이 설명되지 않기 시작해요.
내가 어떤 말에 서운했는지,
어떤 순간에 기대했는지,
왜 지금 마음이 이렇게 불편한지조차
나도 명확히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무뎌져버리더라고요.
이해하는 쪽에만 서 있으면
점점 말이 줄고,
표현이 줄고,
기대도 줄어요.
나는 그 관계를
놓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내가 감정을 조율했고,
공기를 읽었고,
상대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 관계가
나만 이해하는 쪽에 머무는 순간부터,
이건 대화가 아니라
조용한 일방통행이 되어버렸어요.
처음엔 괜찮았어요.
좋아하니까,
소중하니까.
내가 조금만 더 애쓰면
관계는 유지되니까.
하지만 관계가
나의 ‘이해’를 전제로만 움직이게 되었을 때,
그 순간부터 나는
조금씩 고립되고 있었어요.
가끔은 생각해요.
이해하는 사람이 되기보다
이해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누군가가 먼저
“그 말, 너한테 상처였지?”
“너도 힘들었을 텐데…”
그렇게 말해주는 순간이
그토록 그리웠다는 걸.
나는 지금도
그 사람을 좋아해요.
하지만
그 사람만을 위한 관계가 아닌,
우리 둘 다 살아 있는 감정이어야
‘관계’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요.
요즘은 아주 작게
그 관계 속에서
내 마음도 표현하려고 해요.
내가 늘 듣는 역할을 했다면,
이제는 한 번쯤
내 얘기를 먼저 해보는 것.
“사실은… 그날 조금 서운했어.”
“내가 늘 괜찮은 건 아니었어.”
“나도, 너한테 이해받고 싶었어.”
그 말들이
관계를 다시 이어줄 수도,
조금 멀어지게 만들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 어떤 결과든
나만 이해하는 관계보다는
내 감정이 살아 있는 지금이
조금은 더 건강한 방향 같아요.
나도 이해받을 자격이 있어요.
관계 안에서
조용히 지워지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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